[단독] 신라서 온 선화공주는 익산 쌍릉에 없었다

노형석 2019. 9. 19.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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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공주의 흔적은 없었다.

신라 진평왕의 딸로 백제의 30대 임금 무왕(재위 600~641)의 왕비가 되어 전북 익산에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설화로 잘 알려진 역사적 인물이 선화공주다.

대왕릉과 소왕릉에는 설화 <서동요> 에 나오는 연애담의 두 주인공으로 익산에 백제의 왕도를 새롭게 닦으려 했던 무왕과 그의 부인 선화공주가 각각 묻힌 무덤으로 <고려사> 등에 전해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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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릉 소왕릉 발굴결과 공개
석실 내부 100년만에 재발굴
"내부 깨끗, 아무것도 없었다"
소왕릉 봉토 안에서 파묻힌 채 발견된 석주형 묘표석. 길쭉한 사다리꼴의 골무 모양을 하고 있다.

선화공주의 흔적은 없었다.

신라 진평왕의 딸로 백제의 30대 임금 무왕(재위 600~641)의 왕비가 되어 전북 익산에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설화로 잘 알려진 역사적 인물이 선화공주다. 그가 묻혔다고 옛부터 전해져온 전북 익산시 석왕동 쌍릉 소왕릉 내부를 최근 발굴해보니 무덤주인이 선화공주임을 입증하는 유물이나 자취는 전혀 나오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발굴로 드러난 석실 안에서 바깥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 바닥을 채운 관대가 있고, 입구 어귀에는 기울어진채 놓인 석비 모양의 묘표석이 보인다. 치밀하게 다듬은 판석들로 짠 석실 내부는 텅 비었다.
무덤 석실 앞부분의 묘표석과 봉토층 안에서 나온 묘표석을 함께 찍은 사진이다. 기존 한반도 고대고분에서 볼 수 없었던 유물이다.

<한겨레>의 취재 결과, 지난 4월부터 소왕릉을 조사해온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소장 최완규)는 추석 연휴 직후인 지난주초 소왕릉의 유해 안치 공간인 석실 부분까지 파들어가 내부를 집중조사했으나 선화공주의 존재를 실증하는 증거는 찾지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무덤은 1917년 12월 일본 학자 야쓰이 세이이쓰가 쌍릉의 다른 큰 무덤 대왕릉과 함께 일주일간 조사했으나, 1920년 낸 약식보고문에서 “도굴피해가 심해 어떤 부장품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

위에서 내려다본 소왕릉 발굴현장. 단면을 사방으로 갈라 절개한 모습으로, 사진 중간부분의 발굴구덩이 안에 보이는 골무 모양의 석재가 이번에 처음 확인된 묘표석이다.

최완규 소장은 “석실 내부는 쓸어간 것처럼 깨끗한 상태였고, 주검 든 관을 놓는 관대가 새로 확인된 것 외엔 아무 유물도 없었다”면서 “일제강점기 발굴 흔적과 그 이전에 석실 천장 귀퉁이를 뚫고 들어온 도굴 흔적도 확인했다”고 전했다. 그는 “선화공주를 입증하는 직접적 증거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가 아닌 다른 인물을 입증하는 증거도 나오지 않았으므로 선화공주의 설화는 여전히 유효하고 실존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고 본다”고 했다.

연구소 쪽은 선화공주 관련 유물은 찾지 못했으나 무덤의 봉토 내부와, 석실 입구를 막는 폐쇄석 앞 1m 지점에서 무덤을 지키려는 용도로 추정되는 묘표석(표지석) 두점을 각각 찾아냈다. 두 표지석들은 백제시대의 무덤은 물론, 한반도의 고대 고분들 가운데서도 처음 확인되는 유물로, 야쓰이의 1920년 약보고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출토품이다. 봉토 내부에서 뉘어진 채 발견된 표지석(길이 110㎝, 너비 56㎝)은 길쭉한 사다리형으로 골모 모양의 석주 형식이란 점이 눈길을 끈다. 석실 입구 앞에서 비스듬히 세워진 채 발견된 또다른 표지석(길이 125㎝, 너비 77㎝)은 앞면이 정교하게 다듬어졌고, 뒷면은 약간 볼록한 비석 모양을 한 것이 특징이다. 연구소 쪽은 “두 묘표석을 적외선 촬영 했으나 표면에 글자가 새겨진 흔적은 찾지 못했다”면서 “국내 고대 무덤에 각자가 없는 묘표석을 묻은 사례는 만주 집안의 고구려 고분인 우산하 1080호분 밖에 없어 백제 왕실묘장제 연구에 하나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고 설명했다.

소왕릉의 석실. 정교하게 다듬어진 육각형 석실 안에 관대가 보인다. 지난해 발굴된 대왕릉의 것과 얼개가 거의 같은 왕릉급의 시설이다.

또하나, 주목되는 것은 소왕릉이 지난해 발굴된 대왕릉을 그대로 빼어닮은 왕릉급의 얼개임이 확연히 드러났다는 점이다. 소왕릉의 봉분은 지름 12m, 높이 2.7m 정도다. 암갈색 점질토와 적갈색 모래질점토를 번갈아 쌓아올린 판축기법을 썼는데, 대왕릉 판축기법과도 유사하다. 석실은 백제 말기 사비시대 왕릉의 전형적인 얼개인 육각형 단면의 굴식돌방(횡혈식석실)이다. 길이 340㎝, 폭 128㎝, 높이 176㎝로 대왕릉의 석실 규모(길이 400㎝, 폭 175㎝, 높이 225㎝)보다 작으나 측벽 2매, 바닥석 3매, 덮개돌 2매, 후벽 1매, 고임석 1매의 짜임새는 같으며, 석재 가공 또한 대왕릉처럼 정교하다. 최 소장은 “봉토가 판축된 것은 물론, 정교하게 돌판을 다듬어 만든 육각형 석실 구성까지 대왕릉과 거의 똑같은 것으로 나타났다”면서 “소왕릉은 부여의 능산리 왕릉급 고분들과 비교해봐도 봉토나 석실의 규모, 품격 등에서 확실한 왕릉급 무덤인만큼 대왕릉과 더불어 무왕과 그의 왕비가 묻힌 능원으로 봐야한다”고 강조했다. 대왕릉은 지난해 발굴조사에서 백제 사비시대 왕릉군인 능산리 고분들을 능가하는 최대 규모의 무덤방과 정교한 판축기법으로 쌓은 백제시대 봉토가 처음 확인된 바 있다.

소왕릉 봉분의 발굴현장을 옆에서 본 모습. 석실 부분까지 절개한 단면이 보인다.
소왕릉 봉분 둘레에서는 무덤 경계를 짓는 호석들이 배치된 양상도 확인된다. 사진 아래 휘어진 줄처럼 보이는 것이 호석렬이다.

소왕릉은 지난해 발굴한 대왕릉에서 약 180여m 떨어져 있으며, 함께 묶여 쌍릉으로 불리고 있다. 대왕릉과 소왕릉은 향가 <서동요>에 나오는 연애담 설화의 주인공으로 익산에 백제의 왕도를 새롭게 닦으려 했던 무왕과 그의 부인 선화공주가 각각 묻힌 무덤이라고 <고려사> 등에 기록이 전해져 왔다. 실제로 지난해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대왕릉 재발굴 당시 나온 인골이 ‘620~659년 숨진 60대 전후 남성’이란 분석결과를 내놓으며 무덤 주인이 무왕임을 사실상 확증한 바 있다.

연구소는 20일 오후 2시 발굴현장에서 설명회를 열 예정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원광대마한백제문화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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